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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럴림픽에서 뛰고있는 자랑스러운 충북고인 -류호경(10회)
아쉽기는 합니다만 최선을 다하는 그 열정과 흘린 땀방울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는 일이 어렵고 힘들어도 류호경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류호정 선배님도 같이 베이징에 계실 것 같네요. 류호경(43)은 결선합계 701.2점으로 뉴질랜드의 마이클 존슨과 공동 3위에 오른 뒤 3~4위를 가리기 위한 슛오프(경사)에서 10.2점을 쏘는 데 그쳐 10.6점을 기록한 존슨에게 아쉽게 동메달을 넘겨줬다. 류호경은 앞서 9일 혼성 10m 공기소총 복사 슛오프에서도 0.1점차로 동메달을 놓친 바 있어 두 경기 연속 `슛오프 악몽'을 겪었다. - 연합뉴스 사회, 스포츠 | 2008.09.11 (목) 류호경(10회):011-467-9666 류호정(3회):010-4646-6002 한국 장애인 스포츠의 숨은 공로자, 상이군경 2008 베이징패럴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는 77명이다. 남자선수가 58명으로 여자선수보다 2배나 많다. 이 가운데 20살 이상의 나이로 중도 장애를 입은 남자선수는 24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게 있다. 24명 가운데 14명(방위산업체 복무 시 장애 2명 제외)이 군에서 장애인이 된 이들이란 것이다. 특히나 탁구와 양궁은 남자선수 10명 가운데 상이군인이 무려 7, 4명에 이른다. 어찌된 일일까. 대한장애인체육회 박승재 전문체육팀 차장의 말을 들어보자. “1960년 제 1회 로마패럴림픽이 개최됐지만 정작 한국이 출전하기 시작한 건 1968년 텔아비브패럴림픽 때부터다. 당시 2종목에 6명의 선수가 참가했는데 이들이 모두 한국전쟁 때 다친 상이군경이었다. 1984년 뉴욕·에일즈버리패럴림픽 때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이군경이 선수단의 중심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8년 서울패럴림픽 때부터 일반 장애인들이 점점 많아져 균형을 이루기 시작했다." 패럴림픽뿐만이 아니다. 상이군경들이야말로 한국 장애인 스포츠를 이끌어온 주역들이다. 물론 상이군경이라고 해서 특별히 운동신경이 뛰어날 리 없다. 그렇다면 이들이 장애인 스포츠를 이끌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장애인 스포츠가 상이군경의 재활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출발한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1939년 영국의 루드비히 구트만 박사는 2차 대전 당시 척수손상을 입은 자국병사들의 재활을 위해 “수술보다 스포츠를”이란 구호를 외쳤다. 스포츠가 척수손상 환자의 치료와 재활에 큰 효과가 있다는 걸 알았던 구트만 박사는 이를 증명하고자 장애인들에게 양궁을 권유했고 1946년 자비를 들여 휠체어 궁사들이 출전하는 정식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가 향후 패럴림픽의 모태가 된 ‘스토크 맨데빌 양궁대회’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전쟁과 월남전을 겪으며 수많은 상이군경이 생겼고 이들을 위한 재활프로그램으로 스포츠가 장려됐다. 각 시·도 보훈병원들이 앞장 서 수술 뒤 재활 중인 상이군경들에게 탁구와 양궁을 보급했다. 1967년 4월에는 국립 원호병원에서 제 1회 상이군경 체육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한국 장애인 스포츠 사상 처음으로 치른 전국규모 대회로 기억되고 있다. 상이군경이 장애인 스포츠의 중심에 설 수 있던 건 환경적 요인이 컸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 장애인은 스포츠를 접할 기회가 없었다. 설령 어렵게 운동을 시작한다손 쳐도 생활체육으로 가볍게 하다가 일정 수준으로 실력이 오르면 자비를 들여 지도를 받고 이후 선수가 되는 게 기본코스였다. 대부분 선수 목전에서 운동을 그만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이에 반해 상이군경은 보훈처에서 적극 지원을 하고 전용 체육관도 있어 운동을 시작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전문 지도자로부터 무료 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 박동희 칼럼 중에서/ 스포츠춘추